찬송 502장(빛의 사자들이여)
(마 11:7-11, 개정)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세례요한의 제자들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이어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7-8절에서,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광야로 나온 이유를 묻습니다. 광야에 나온 이유가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왕궁에 사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광야에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본문 9절에서,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아멘.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에게 너희가 광야에 나온 이유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을 보기 위해서 나왔는데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가 세례요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은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그것도 무려 400년간 지속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무뎌진 그들의 심령을 일깨워줄 선지자도 없었고, 하나님께 돌이키려는 회개의 몸부림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암흑기에 소망도 없었고, 되는대로 살지 뭐~! 신앙을 포기했던 영적 혼란의 시대에 그 모든 암흑기를 뚫고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처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 속에 정치적인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지도자들의 부패로 인해 상실감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 세례요한의 선지자적 외침은 잠자던 영혼들을 일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작은 희망의 빛이 밝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외침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는 선지자들이 세례요한보다 못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예레미야도 호세아도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치켜세우셨던 이유는 잠자던 영혼을 일깨우는 사역을 뛰어넘어 온 인류의 구원자, 희생의 대속제물,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를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했던 겁니다.
본문 10절에서,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아멘. 이렇게 주님은 구약의 말라기 3장 1절 말씀과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말 3:1, 개정)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아멘.
(사 40:3, 개정)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아멘.
이렇게 본문 10절 말씀은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한 문장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마다 수도관처럼 영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지만 공급받는 은혜의 관이 있습니다. 그 관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회개의 외침은 생명수 공급을 보다 원활하게 공급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죄 때문에 영적인 공급로가 막혀 있으면 어떤 진정한 외침에도 잠자는 영혼들을 깨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선물해 줘도 몸을 씻지 않고 입는다면 냄새나고 격에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우리 심령의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을 것을 줘도 받지 못합니다. 돼지에게 진주나 보석을 주면 그 귀한 보물을 밟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가정 먼저 필요한 것은 회개의 심령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 생명의 말씀이 뿌려질 때 진실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생명의 말씀에 진실하게 반응하는 심령인 줄 믿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에서 보면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포도원에서 일했던 일꾼들에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 균등하게 나눠줬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불평등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이스라엘의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사역을 한 것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세례요한보다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에 한 영혼 한 영혼의 생명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가 예수님의 생명 가치와 같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늦게 복음 사역에 동참한다 해도 누구나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주님은 부족한 우리도 세례요한 못지않게 더 크다고 더 존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 가치는 예수님의 생명 가치입니다. 왜냐면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오늘 하루도 그 사랑 안에서 머물며 가치 있는 생명을 죽어가는 자들에게 흘려보내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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