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370장(주 안에 있는 나에게)
(마 11:25-30, 개정)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으면 사사나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면 용서해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11장에서도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향하여 두로와 시돈, 소돔보다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무리 기도로 마태복음 11장 말씀을 끝맺었습니다.
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퀴리오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써 하늘과 땅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당시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로서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적과 기사의 권능을 행하시고 계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고 구원의 메시아를 믿지 못했습니다. 세속의 가치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 안다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앎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의가 강하기에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지혜는 어린아이와 같이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산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기는 부모의 보살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부모님께 모든 필요를 공급받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진정한 지혜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약한 어린아이와 같다고 인정하며 강하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26절 말씀에서, 자신이 지혜롭고 강하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없게 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강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프고 힘들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힘든 고난이 올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26절). 인간은 간사해서 고난이 없으면 사사기 시대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본문 2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모든 왕권을 포기하고 낮고 낮은 이 땅 가운데 오셨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위임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반드시 영혼 구원을 위해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고,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것이 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 것이 되었고, 예수님 짜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많이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구원자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라고 밝히셨습니다(27절).
본문 28-29절에서,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아멘. 그 당시 유대인들이 농사할 때 두 마리 소에 멍에를 지워서 일을 시켰습니다. ‘나의 명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멍에를 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멍에를 모두 지시겠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소 두 마리에게 같이 명에를 지우는데 어미 소와 어린 송아지에게 함께 멍에를 매게 되면 결국, 누가 밭을 갈겠습니까? 어미 소입니다. 어린 송아지와 같은 우리는 흉내만 내고,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멍에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발걸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영혼을 살리는 길을 걸어갈 때 진정한 감동과 주님의 마음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깊은 교제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진정한 마음의 쉼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던 것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아픔과 슬픔을 이미 예수님도 2,000년 전에 몸소 많은 고난을 겪으셨기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멍에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멍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 멍에는 영혼 살리고 구원하는 사명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 멍에를 질 수 있었던 것은 사랑으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지는 짐은 언제나 가볍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영혼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멍에를 질 때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멍에를 지는 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멍에는 희생입니다. 멍에는 사랑입니다. 멍에는 생명입니다. 멍에는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영적인 도구입니다. 멍에는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로 연결해주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멍에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며 영혼을 살리는 복된 한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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