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456장(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마 12:17-21, 개정)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렇게 병자들을 고치셨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신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병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 42장 1-4절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대로 바리새인과 다투지 않고 그들을 피해 복음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주장대로 임의로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말씀대로 사역했기 때문에 ‘내가 택한 종’(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고 마태는 이사야 글을 인용해 메시아를 표현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아멘. 본문 18절에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종’으로 표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할 때 (헬라어로 ‘휘오스’) ‘아들’ 혹은 (헬라어로 ‘테크논’) ‘자녀’로 표현하는 것이 맞는데 ‘종’이라는 표현을 왜 썼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 18절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이스’라는 단어로써 ‘아이, 소년, 어린아이’를 뜻합니다. 한글로 번역할 때 ‘종’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노예’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노예는 ‘둘로스’입니다. ‘둘로스’는 ‘매다, 묶다, 사로잡힌, 종속적인, 노예, 헌신적인 종, 동역자’의 뜻입니다.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표기하지 않고, ‘파이스’라는 ‘아이, 소년, 어린아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애칭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랬고, 마태도 똑같이 ‘아이’라는 표현을 썼던 이유는 자원하는 마음, 순수한 마음, 순종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썼던 겁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 성육신하시고, 낮고 낮은 어린아이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짐승의 밥그릇이었던 구유에 누이셨고 짐승보다 못한 인간을 구원코자 자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스러운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애칭이 ‘아이’ ‘파이스’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여기서 ‘순종이 제사 보다 낮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순종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순종을 우리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영혼을 살리는 순종의 자리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본문 19절에서,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의 반대 질문만 답변하시고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예수님과 불신자들과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이깁니다. 전도할 때 불신자들과 논쟁이 붙으면 전도자가 이길까요? 아니면 불신자가 이길까요? 전도자가 이깁니다. 우리는 눈감고도 1시간씩 기도할 정도로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전도폭발 한국본부에서 전도 강의를 할 때 목사님들께 이렇게 강의했습니다. ‘논쟁에서 이기면 영혼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반대 질문에 대해 빨리 대답하고, 논쟁을 피하셨던 것은 주변에 있었던 영혼들을 잃지 않기 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거듭나지도) 않은 영혼과 싸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도현장에서 불신자들과 논쟁하면 말싸움은 이길 수 있으나 영혼을 잃을 수 있기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 피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 20절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아멘.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상한 심령과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심령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들이 온전히 회복하고 이길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영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며 오르셨습니다. 마지막 물과 피 한 방울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서 모두 쏟아 주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르실 때 ‘종’이라는 헬라어로 ‘파이스’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애칭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영혼을 살리기 위한 순종과 희생적인 삶에 있습니다. 이 지역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전도의 자리로 나갈 때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는 애칭을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모든 이방 사람들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바라고 소망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서 42장 4절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시계추가 유대인에서 ‘섬들’이라는 이방인에게로 옮겨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순종이 없었다면 이방인인 우리는 심판받아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를 살렸듯이 우리도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탁하신 영혼 구원의 사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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