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93장(예수는 나의 힘이요)
(요 17: 1, 개정)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JUST EE 전도훈련 중에 제가 마지막 과에서 ‘죽음과 복음의 능력’에 관한 내용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작 전에 훈련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겠습니까?” 이 질문에 어떤 분은 믿지 않는 부모님과 그리고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하셨고, 어떤 분은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하셨고, 또 어떤 분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계승을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께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 1절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여기서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임박할 때를 말합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예수님이 붙잡히고, 모진 고초를 당하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헤어지게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을까요? 예수님은 마지막 남은 시간을 기도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셨습니다.
본문 1절 상반절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멘.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왜냐면 ‘하늘’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우라노스’입니다. ‘우라노스’는 ‘오로스’라는 ‘산, 고지’(히-오로스)의 뜻을 가진 헬라어에서 유래됐습니다. ‘우라노스’는 포괄적으로 ‘천상’(하나님의 처소, 천국)을 뜻하고, 함축적으로는 ‘행복’, ‘권능’, ‘영원’, 기독교의 ‘복음’, ‘공기’ 등의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주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땅을 바라보면 세상 주관자인 사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탄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 결과 땅으로 내침을 받았습니다. (사 14:12, 개정)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여기서 ‘계명성’은 새벽에 밝게 뜨는 ‘금성’을 의미합니다. ‘새벽별’인 ‘금성’은 태양이 뜨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땅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면 사탄처럼 교만해져서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과 내가 원하는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이 땅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땅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해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에스겔서 1장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 위해 눈을 들어 위를 향했습니다.
모세 시대 때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출 19:11 개정) “...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아멘. 구약시대 때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산’은 히브리어로 ‘하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시 121:1-2, 개정) “(1)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아멘. 이렇게 시편 기자는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며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마 27:50-51, 개정)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아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행하신 일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천국이 위에 존재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어느 한 곳에서만 머무는 존재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에스겔과 모세와 시편 기자는 모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높은 곳을 바라봤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곳을 사모하며 매일 신학교 옥상에 있는 개인 기도실에서 기도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앞부분 내용이 자신을 위한 기도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말씀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절 하반절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멘. 앞서 말씀드렸듯이 “때가 이르렀사오니”의 ‘때’는 십자가의 죽음이 곧 임박한 때를 말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때’,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때’가 십자가를 질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때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낼 때였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고,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므로 아들 예수님께도 영광이 되는 때를 바라보며 기도하셨던 겁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때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질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임을 잘 알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죽음의 잔을 마시겠다’는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의 아픔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데 초점을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교만과 불순종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죄의 눈이 가려진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철저하게 죽기까지 순종의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받으셨고, 죄인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성숙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신약 설교 > 요한복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7장 6-10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1, 내게 주신 자, 아버지의 것은 내 것, 영광 (0) | 2024.07.24 |
---|---|
요한복음 17장 2-5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소서, 만민에게 영생을, 주님이 책임지는 다스리는 권세 (0) | 2024.07.23 |
요한복음 16장 32-33절, 평안,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0) | 2024.07.20 |
요한복음 16장 25-31절,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 비유에서 직설 화법으로, 성령이 임하는 그날 (0) | 2024.07.20 |
요한복음 16장 21-24절, 그리스도인의 3가지 기쁨, 해산의 기쁨, 빼앗을 수 없는 기쁨, 기도 응답의 기쁨 (0) | 202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