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장(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요 21:1-3, 개정)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마태복음 28장 10절 하반절에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전해 들었지만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숨은 곳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갈릴리로 향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사도 요한은 ‘갈릴리’를 ‘디베랴’로 썼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북쪽 지역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디베랴’라는 지명을 사도 요한이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 호수 북쪽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살았던 이방지역이었기에 ‘디베랴’라고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지명을 따라 사용했습니다.
이방인이 사용했던 ‘디베랴’ 호수의 지명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방인이 사용했던 지명이 성경에 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던 장소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이름도 ‘아우구스투스 가이사’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디베랴’, ‘가이사랴’ 지명은 황제의 이름을 딴 지명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사상은 황제가 신이었고, 물질 만능의 상징이었습니다.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 사명을 내놓고 다시 물고기 잡는 것을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말씀했습니다.
다시 옛 습관을 쫓아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에 대해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디베랴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이 ‘시몬’이란 이름은 ‘듣는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했던 ‘시몬’이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반석’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석이라는 이름 뜻에 걸맞지 않게 베드로는 부활의 예수님을 의심하고 흔들리며 또 옛 습관을 쫓아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본문 2절에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도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헬라어로 ‘디두모’는 ‘쌍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던 의심 많은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그 고백이 무색할 만큼 물질 만능의 상징인 ‘디베랴’ 호수에서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한번 만났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다시 도마가 부활을 의심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쌍둥이 도마”라고 기술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은 어떻습니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메시아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가난하고 무시당하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반문했습니다. 빌립은 포기하지 않고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요 1:46)고 권고하며 예수님께로 데려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고 말씀했습니다. 나다나엘만 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했던 비밀 장소를 아셨기에 예수님께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나다나엘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때도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경험했습니다(요 2:1-11). 그런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나다나엘은 또 부활을 의심하며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 말았던 겁니다.
본문 2절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은 누구입니까?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마 20:20-23).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도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기 위해서 고기를 잡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서, ‘다른 제자 둘’은 누구라고 성경에서 정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추측을 해보자면 본문 2절에서 베드로와 나다나엘의 단짝과 같은 인물이 안드레와 빌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 ‘디베랴’라는 지명이 언급됐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빌립과 안드레가 중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모든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또다시 부활의 예수님을 의심하고 고기를 잡으러 갔던 겁니다.
본문 3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어라 가노라’라고 말하니까 나머지 6명의 제자도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6명의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아무리 풍부한 경험자여도 주님보다 앞서가거나 내 뜻대로 살아갈 때 주님은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면목이 없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세상의 상징인 ‘디베랴’에 가서 고기 잡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단했으면 주님의 뜻을 따라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요 8:12, 개정)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멘. 세상의 빛,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밤’에 고기를 잡겠다고, ‘디베랴’라 하는 ‘물질 만능주의’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도 갈 길을 잃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방황합니다. 아무리 ‘물질’이 좋아도 그 물질을 주고 안 주고도 주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디베랴’라는 ‘물질 만능주의’를 막아주시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디베랴’, ‘물고기’,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부활의 예수님입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동행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신약 설교 > 요한복음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21장 15-19절, 베드로, 숯불, 아가페, 필레오, 주님의 사명, 양을 먹기고 돌보라 (0) | 2024.08.17 |
---|---|
요한복음 21장 4-14절, 디베랴 호수에서의 교훈, 큰 물고기, 153마리, 찢어지지 않은 그물, 사명 (0) | 2024.08.16 |
요한복음 20장 24-31절, 도마 이야기, 스티그마, 평강,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0) | 2024.08.14 |
요한복음 20장 21-23절, 열 제자 이야기2, 부활, 평강,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죄 사함 (0) | 2024.08.13 |
요한복음 20장 19-20절, 열 제자 이야기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스티그마,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 (0) | 2024.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