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570장(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요 10:11-21, 개정)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21)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참 목자 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목자는 사나운 맹수를 만나면 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11절). 그러나 삯꾼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 않습니다(12절). 맹수가 양 우리를 공격할 때 삯꾼인 일용직 목자는 양을 버려두고 도망치기 바쁘지만 참 목자는 양을 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당시 적은 수의 양을 키우는 목자는 양을 키울 때 자기 가족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양 이름도 지어주고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과 같은 마음일 겁니다. 양을 키우면서 정이 들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양처럼 연약한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에 예수님이야말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본문 14-15절 말씀에서,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아멘.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양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입니다. 마치 부부관계처럼 경험적인 깊은 앎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과의 친밀한 관계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의 친밀한 관계로 서로 비교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양’과 같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양 우리(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기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우리는 항상 친밀한 관계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길 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에서와 같이 오직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야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영이시기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앎이 있어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설명하시기 위해 삯꾼과 비교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에서,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아멘. 이렇게 양을 돌보기 위해 돈을 주고 고용한 목자가 삯꾼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시적으로 목자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주인만큼 양들을 향해 애정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고용된 삯꾼을 ‘악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삯꾼은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 양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가 나타나면 양보다 먼저 도망갔습니다. 그것이 삯을 받았던 임시 목자의 한계였습니다.
저를 비롯해 이 땅에 모든 목회자는 엄밀하게 임시적인 삯꾼에 불과합니다. 저를 믿지 마시고, 맹수와 같은 사탄의 공격에서 보호해주시고 구원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만 믿고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알아야 하고 사모해야 할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었던(16절)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더 가까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작은 목자가 되어서 이 땅에 주님의 양들을 대할 때 우리 또한 목숨을 내어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도 성도들을 위해 이웃을 위해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마다 우리가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로, 교회에서는 교사, 구역장, 구역 강사로, 직분 자로서 목자처럼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선한 목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고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심판하고 사형을 내릴 권위가 있다고 착각했지만, 예수님 스스로가 사랑하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18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서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렸거나 미쳤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말라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20절).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맹인을 고치신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은혜의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가르쳐주셔야 믿어질 수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생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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