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143장(웬말인가 날 위하여)
(마 27:11-14, 개정)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뒤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성 모독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사형을 확정하려면 로마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이른 새벽에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막 15:1).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들의 종교 분쟁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법에서도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를 사형으로 다스릴 법적인 근거가 없었기에 종교지도자들은 ‘신성 모독’ 죄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죄목을 변경해서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반역죄로 몰아갔습니다(11절).
종교지도자들이 내렸던 신성 모독의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바꿔서 로마 정부에 고발할 정도로 그들은 간사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고발했던 죄목 속에는 예수님이 로마의 세금 납부를 반대한다는 거짓 죄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눅 23:2).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세금 납부를 반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고발했지만, 그것 역시 로마의 위협이 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썩어질 이 땅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이고,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영적인 나라였습니다. (눅 17:21, 개정)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아멘.
어쨌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참소는 빌라도에게 호소력 있게 먹혔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참소를 조금 더 경청하게 되었지만,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참소를 하게 된 동기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을 수없이 많이 했던 총독으로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12절).
본문 13절에서,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이렇게 예수님을 공격하는 수많은 증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재판에서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주관했던 재판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보기에 크게 놀라웠던 겁니다.
본문 14절에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모든 재판에서 피고인은 자신의 죄를 변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자신을 변호하여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듣기에도 말이 안 되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제삼자였던 빌라도가 보기에도 ‘놀라워’할 정도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재판 경험으로 비춰볼 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정부에 반역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이 거짓으로 고발하고 있음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 품위와 인격적인 성품을 보았고,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내하시는 모습과 그 모든 수난을 감내하시는 태도가 그리스도인에게 큰 능력의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거짓 증언들로 곤란한 가운데서도 자신을 변호하거나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큰 힘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침묵하며 순종하는 것이 능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인 살리는 일을 위해 나는 죽고, 영혼을 살리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낮추고, 하나님의 목소리만 높일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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