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96장(예수님은 누구신가)
(요일 3:6, 개정)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안다”라는 동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짧은 요한일서에서 “안다”라는 동사를 39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잘못된 영지주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올바른 “앎”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1) “안다”-(기노스코)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안다”라는 단어를 두 가지 헬라어 동사를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기노스코’였고, 하나는 ‘오이다’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안다”가 ‘기노스코’입니다. 본문 6절에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아멘. 이렇게 범죄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많이 접해 들었기 때문에 지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사도 요한은 범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게 된 살아있는 지식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눅 1:34, 개정)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아멘. 처녀인 마리아가 메시아를 잉태한다는 천사의 말에 대해 반박했던 단어가 “안다”라는 헬라어의 ‘기노스코’였습니다. ‘기노스코’의 뜻은 부부의 성관계, 부부간에 인격적인 모든 관계를 포함한 경험적인 깊은 앎을 뜻합니다.
남녀가 만나서 연애 기간을 거쳐 표면적으로 사귈 때보다도 부부가 되어 함께 살다 보면 장단점을 모두 알게 됩니다. 겉만 봐서는 상대방을 잘 알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야 상대방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노스코’의 “앎”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기노스코’라는 동사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맺어진 인격적 관계를 통한 “앎”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범죄 하는 사람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회개하지 않고 죄 사함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을 습득해서 구원받으려고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반면, 사도 요한이 주장하는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완전히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엡 2:8-9, 개정)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멘.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는 일반적인 지식과 더불어 성령님이 비춰주시는 조명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죽음이 나 대신 죽으신 대속적인 희생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해서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2) “안다”-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앎”이 헬라어로 ‘오이다’ 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이다’는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이 성령의 빛을 비춰주실 때 죄인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님과의 경험적인 “앎”이 바로 ‘기노스코’입니다. 결국, 사도 요한에 의하면 구원의 역사에서 ‘오이다’와 ‘기노스코’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일반적인 “앎”, 곧 ‘오이다’는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일반적인 지식, 곧 ‘오이다’도 ‘기노스코’를 경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통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노스코’도 ‘오이다’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을 통하여 주시는 “앎”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2:20, 개정)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여기서 “아느니라”라는 단어가 ‘오이다’ 동사입니다.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인 “앎”에 성령의 임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앎이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3) 행위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일반적인 ‘오이다’의 앎의 지식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그분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깊은 영적 교제 속에서 ‘기노스코’의 “앎”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요 17:3, 개정)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멘.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기도에서 “안다”는 동사는 경험적으로 맺게 된 관계를 강조하는 ‘기노스코’의 “앎”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 속에서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이 저지르는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본문 6절에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아멘.
이렇게 “그 안에 거하는 자”의 특징이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명령을 그대로 순종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주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에 대해서 일반적인 “앎”과 경험적인 “앎”을 똑같이 강조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오이다’로 알고 있으나 예수님처럼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위선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봐야만 합니다. 어쩌면 ‘기노스코’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한 “앎”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3요소는 지식, 동의, 신뢰입니다. 일반적인 지식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동의하게 되고, 주님과 교제하면서 진정한 경험적인 앎을 통해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임재 가운데 ‘기노스코’의 진실한 교제가 없다면 하루하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성령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시면서 주님을 더 가까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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