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499장(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요 1: 43-51)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 빌립이 만난 예수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2명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불렀던 시점은 어떠한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본문 4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는 길에 ‘빌립’을 만났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빌립은 즉시 예수님을 따랐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빌립 혼자서만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본문 45절에서, 가장 친했던 ‘나다니엘’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증언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을 때 나다나엘은 부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본문 46절에서,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갈릴리 지역은 유대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던 지역이었는데, 더군다나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 가운데서도 가장 천대받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실 나다나엘도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 살았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출생은 나사렛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에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서 나다나엘이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러함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일단 “와서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빌립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바뀌었던 것처럼 나다나엘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바뀌게 될 것을 알았기에 ‘와서 보라’고 간청했던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믿음과 상관없거나, 잘 모르는 무지 때문에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빌립이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며 지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했던 것처럼 꼭 기적이 있어야만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빌립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성령 충만도 말씀이 충만할 때 성령 충만 받게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주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2. 나다나엘이 만난 예수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 전도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바돌로매”이기도 합니다. 친한 친구 빌립의 간청으로 나다나엘은 탐탁지 않았지만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본문 47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는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본문 45~46절에서, 빌립이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소개했을 때, 나다나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했지만, 나다나엘 자신도 비천했던 갈릴리 출신으로서 유대 사람들에게 차별과 무시를 많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진실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경건하게 살았지만,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나다나엘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었던” 나다나엘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주니까 자신의 신앙상태를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서나 본문 48절에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시자 나다나엘은 두손 두발 들고 예수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화과 나무 그늘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자신이 진실하게 경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장소는 오로지 자신과 하나님만 아는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나다나엘은 즉시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더 먼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아멘.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을 들었던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찾으면서 말씀과 기도 생활하면서 보았던 영광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를 통해서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50절).
본문 51절에서,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야곱이 잠 깨어 자신이 누웠던 곳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늘과 땅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창 28:19). 그런데 야곱이 경험했던 것보다도 나다나엘은 더욱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인자 위에 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나다나엘이 경험했던 예수님 보다도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안에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의 믿음이 자라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구원자 예수를 전했던 것처럼 우리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많이 나눠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웃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더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과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표적을 보고 따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게 되었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우리 삶에 적용하면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는 복된 한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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