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453장(예수 더 알기 원하네)
(요일 1:1-3, 개정)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사도 요한을 포함하여 제자들이 “태초부터 계셨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듣고, 만났다고 요한일서 1장 1~2절에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두 번씩 강조한 것도 부족했는지 오늘 본문 3절에, 또다시 반복해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렇게 3번씩 반복해서 그들이 체험한 것을 강조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너무나도 확실한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었고, 그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마 20:20-21, 24)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렇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가서 영의정 좌의정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그때 나머지 열 제가가 듣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본래 이유가 민족을 선동해서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실 정치적인 메시아를 따르다 보면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고 그 나라가 세워지면 일등 공신이 되어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기 위한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밖에 몰랐던 이기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사역에 동참했으나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실 때 사도 요한만 빼놓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배반했던 제자들은 염치가 없어서 예수님께 감히 다가가는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가 만나주셨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눅 24:36, 요 20:19, 21, 26)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용납하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 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쫓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이타적인 신앙으로 돌이킵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보니, 예수의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이 되었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했던 놀라운 변화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나누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타는 사명감을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제자들은 입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핍박의 시대에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복음이었기에 그들은 몸과 마음과 생명을 모두 바쳐 전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단절될 수밖에 없는 죄의 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리로 건너게 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저 받는 은혜이기 때문에 구원은 소극적인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목숨 걸고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죄 용서는 물론 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제자들이 생명을 걸면서 전한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죄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기 때문에 소극적인 차원의 은혜이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은 적극적인 차원에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배드리며, 기도하며, 찬양하며, 묵상하며, 전도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고, 적극적인 사귐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와의 사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구역 모임을 통해 신앙의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사귐’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기에 적극적인 차원의 은혜입니다. 소극적인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얻을 수 있지만, 적극적인 사귐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3절에서의 ‘사귐’은 인간관계에서 하는 취미활동이나 동호회를 통한 사귐과 차원이 다른 사귐입니다. 사도 요한이 언급한 사귐은 인간관계를 통한 사귐 활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배경과 취미와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어울리고 나누는 사귐입니다. 기독교의 사귐에 핵심 공통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의 사귐은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취미가 달라도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사귐입니다.
제가 10년 전에 국제회의에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300여명의 전도 훈련 강사였던 목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가졌던 신앙고백을 똑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찬양을 했고,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전략을 공유했고, 그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은 모두가 똑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서 1장 3절에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진정한 사귐을 일구기 위해서 생명 걸고 복음을 전했던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듣는 자들을 “우리”라는 단어와 “너희”라는 단어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상반절에서,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3년씩 따르면서 직접 듣고, 보고, 만진 제자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너희”가 누구인지 사도 요한이 전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누구든지 간에 예수 안에서 조건 없는 사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귀족이든지, 노예이든지, 부유하든, 가난하든, 조건 없이 사귐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의 “너희”라는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너희”라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너희”라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존귀한 “너희를 영원한 사귐 속에서 거하길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천지 이단에서 말하는 십사만 사천 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을 더 적극적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더 깊이 있는 기도의 사귐으로, 더 깊이 있는 말씀의 사귐으로, 더 깊이 있는 예배의 사귐으로 한 걸음 더 하나님을 가까이하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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