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요일 1:2, 개정)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앞서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특징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모든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영원에 속하셨던 초월자로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성육하신 예수님을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의 범주 속에서도 존재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성과 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참 인간이십니다. 인류 역사상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2절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영원 자체이신 예수님과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 사이에는 너무도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원이라는 그 큰 간격을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좁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신 신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예수님의 신성을 뜻합니다.
그리고 “나타내신 바 된지라”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타내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교제할 수 있는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영~원이라고 하는 신성만 있었다면 그 영원에 대해서 우리는 감지하거나 인지할 수 없습니다. 유한성과 영원성은 서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이해되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벌레와 대화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벌레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벌레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벌레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미련하고 아둔한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지만, 죄의 눈으로 가려진 인간은 얼마나 교만한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 시대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기록된 구약성경을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미래와 영생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의 말씀을 토대로 메시야, 곧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유한 지식에는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직접 듣고, 보고, 만지면서 체험한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예언과 제사 제도의 모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둘째로, 당시 교회 안에 있었던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의 축적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그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지식이 많아지면 마침내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지식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기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결코 없습니다. ‘허블 망원경’보다 더 좋은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으로도 우주를 모두 측량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우주를 무한대라고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크기는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감자를 연구하는 감자 박사도 주먹만 한 감자 하나도 다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직접 듣고, 보고, 만진 체험이 없는 지식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교리와 성경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만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 당시에 존재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누구보다도 구약성경에 능통했었던 유대인들의 앎(기노스코)은 어떤 앎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나타나셨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죽도록 모의했습니다. 그들이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메시야는 로마의 핍박으로부터 해방 시켜 주는 다윗 왕과 같은 정치적인 구원자여야 한다는 그릇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오류는 한계가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늪에 빠져있는 한계 상황을 깨닫는 구원이 가장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추구했었던 지식만으로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했었던 인간적인 지식 때문에 참된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많이 배웠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직접 체험적으로 깊이 경험하여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안다는 것이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경험적인 앎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괜히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성경적인 앎에 대해서 굉장히 갈급해하고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식적인 앎으로 그치게 되니까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앎이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생명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밝히 보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죄의 늪에 깊이 빠져가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원한 단절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우리 실존을 발견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미신 구원의 손길을 잡고, 만져지는 체험적인 앎이 될 때 비로소 영원이라고 하는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된 진정한 앎은 사랑이 동반됩니다. 진정한 앎은 희생이 동반됩니다. 진정한 앎은 겸손합니다. 진정한 앎은 내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진정한 앎은 나누는 것입니다. 진정한 앎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앎은 세상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진정한 앎은 예수님을 매 순간 만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오늘 하루도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만져지는 경험적인 앎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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