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마 10:34-39, 개정)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오늘 본문도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전도현장으로 파송하기 전에 전도 교육을 하셨습니다.
본문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아멘. 복음의 핵심은 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데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삶의 주인이 나에게서 예수님께로 옮겨집니다. 왜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드냐면 지금까지 내가 왕으로 살면서 내 맘대로 살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영향력 안에 거하면서 내 마음대로 못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내적인 갈등이 전도자와 전도대상자 사이에서 마찰 빚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현장은 영적인 싸움이 치열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화평이 아닌 검과 같이 찌르는 역할을 합니다. 더불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은 멀리하고 잘라내야 하기에 말씀의 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검은 우리 내면에 썩은 죄를 도려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검 때문에 죄를 칼로 도려내는 아픔도 있지만,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잘라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검은 성령의 검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찔림을 주십니다.
본문 35-36절에서,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멘. 마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복음 사역을 펼치기 위해서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을 가장 많이 핍박했던 무리가 동족이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동족이었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해도 태연하게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빛을 비출 때 반드시 2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복음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유대인이었지만, 유대 집안 식구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본문 36절에서, ‘원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크트로스’입니다. 이 말은 ‘미워하다, 증오하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탄’을 뜻하기도 합니다.)
본문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멘. 이 말씀은 난해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필레오’의 사랑은 사람 간의 애정이나 친구 간의 우정을 뜻합니다. ‘에로스’는 연인 간의 사랑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필레오’의 사랑입니다. ‘필레오’의 애정을 가지고는 죄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아가페’의 사랑인 십자가의 사랑, 초월적인 하나님의 무 조건적인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일 4:8, 개정)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그래서 본문 37절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반사체와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질 때 그 사랑의 빛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사랑의 본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반사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되어야만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우선 적으로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본문 35-39절에서,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아멘. 시간 적으로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언급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로마 군인들은 유대 반란군을 십자가로 처형시켰습니다.
로마 군대는 십자가 처형이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저주를 받는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벌이었기에 로마 군대는 유대인들을 처형할 때 십자가로 처형시켰던 겁니다. (신 21:23, 개정)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제자들이 복음을 위해 세상과 맞서서 싸워야 했고, 그 싸움에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모욕적인 일들이 일어나도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제자들에게 도전하셨던 겁니다.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달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확신 속에서 주님을 따르라고 도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갈 3:13,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아멘.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순교를 당해도 이미 예수님이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에 십자가를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이 당장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육신의 목숨을 잠시 얻을 수 있겠으나 결국 심판의 때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하면 마지막 심판의 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 전도의 사명은 오늘날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복된 제자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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