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171장(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마 16:1-12, 개정)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들의 외식과 불의가 드러나 기득권을 빼앗길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가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요구했습니다(1절). 그들의 의도는 하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어떻게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말하길 날씨는 잘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른다고 책망하셨습니다(3절).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가리키면서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욘 1:1-2:10)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의 사명을 저버리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지내게 됩니다.
그 후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 백성은 회개했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뒤 3일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게 될 것을 예표 했던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적과 표적에 열광합니다.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박혁 전도자라는 사람이 유튜브로 자신이 치유하는 영상을 올립니다. 이런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4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아멘. 여러분~!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적과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적과 표적을 많이 일으켜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을 때보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을 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예루살렘의 딸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눅 23:28). 백부장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막 15:39, 개정)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아멘.
여러분! 예수님은 죽었던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나사로를 모두 살려 주셨습니다. 병자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능력 전도가 병을 고치고, 이적과 표적을 일으키는 것이 능력 전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온전하고 완전한 치유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 6:40, 개정)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고, 마지막 날에 예수 믿는 자들을 부활케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시적인 치유 역사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치유를 뛰어넘는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주신 영생과 부활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이 궁극적인 완전한 치유입니다. 이 땅에서의 치유는 완전한 치유가 없습니다. 치유 받아도 또 병이 들고 죽습니다. 그러기에 능력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 능력 전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적과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죄 짊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복음의 표적만 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구원의 의’를 자신의 의로운 행함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른 행동과 종교적인 행위를 잘한다 해도 단 한 번만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약 2:10, 개정)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아멘. 죄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시키기에 죄의 영향력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는 무서운 죽음의 질병입니다.
본문 6절에서, 예수님은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했을 때, 제자들은 떡을 가져오지 못했다고 엉뚱한 걱정을 합니다(7절). 이때 예수님은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신 표적을 말씀하시면서 육신의 양식문제로 염려하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8-10절).
누룩이라는 것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를 발효시키기 위해 첨가하는 미생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생명의 빵을 만드는 좋은 재료로 누룩을 말씀하시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교훈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가식적이고, 형식주의를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삶에 만족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로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위선의 누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위선적인 누룩이 사람을 썩게 만든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2:1; 고전 5:6-8; 갈 5:9). 그들의 위선적인 잘못된 교훈은, 적은 양의 누룩이 빵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사소해 보여도 복음 전체를 왜곡시킬 수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거나, 사두개인처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기복적 신앙을 예수님은 염려하며 제자들에게 주의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영적 자만심 속에서 자기 의로움에 빠져 위선적인 외식주의, 형식주의, 외적인 종교주의에 빠져 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처럼 현실주의, 회의주의, 합리주의, 세속주의에 빠져 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다른 종교적인 색깔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예수님께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결국 원수끼리 서로 연합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악인들은 생명을 죽이려는 습성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생명력이 있는 부르짖는 기도나, 뜨거운 찬양이나, 열정적인 전도나, 사랑의 섬김이나, 사람이 세워질 때 찬물을 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표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내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진정한 표적이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표적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처럼 현실주의에 빠져서 이 땅의 세속에 가치만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표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표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승리하는 사순절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