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96장(예수님은 누구신가)
(요 11:17-37, 개정)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도착했으나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4일이 지났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조문객들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17-19절).
예수님께서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마르다는 뛰쳐나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마르다는 몸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8-42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기에 열중했습니다. 이처럼 마르다는 어딘가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손발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조문객들과 함께 있었습니다(20절).
예수님을 맞이했던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1-22절에서,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렇게 마르다는 예수님께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도착하셨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왜 이제 오셨나요?”라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싶었을 겁니다. 마르다의 마음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니이다”(22절)라고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마르다의 고백처럼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23절).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습니다. 마르다는 나중 부활 때 일어날 위로의 말씀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마르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25-27). 마르다는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실제적인 기적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죽음은 의학적으로 완전히 썩고 부패한 완전히 죽은 상태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 살려주셨던 사람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장사하러 가던 중에 살렸지만 죽은 지 4일 만에 살린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시신이 부패한 완전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기도해놓고, 응답받지 못할 것 같은 불가능한 기도가 과연 응답받을 수 있을까? 그런 경험들은 한 번쯤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불러내시자 마리아도 마르다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본문 32절에서,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리아는 비통한 심정으로 원망 섞인 말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공감해주셨습니다. 본문 33절에서,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아멘. 그리고 본문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아멘.
분명히 예수님의 눈물과 마리아의 눈물은 또 다른 의미의 눈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은 나사로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까지는 다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흘린 슬픔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몇 분 뒤면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신 것은 나사로 때문에 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기셨던 이유는 마리아의 슬픔을 예수님께서도 느끼셨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며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죄악과 그 죄악의 결과 때문에 죽음의 고통으로 아파하며 울었던 모든 인생을 보시면서 함께 우셨던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원치 않는 질병이나 고난이 임했을 때 아파하며 울고 있을 때 주님도 우리 아픔을 함께 공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조문하러 왔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사로를 무척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36절). 그런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 왜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리지 않으셨냐면서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37절). 그렇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조문했던 사람들은 앞으로 벌어질 놀라운 일들에 대해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혹여나 아프고 슬픈 마음을 가진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한날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