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20장(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요 17:2-5, 개정)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도 헌혈을 한 번쯤 해보셨을 겁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헌혈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나눈 생명의 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나눈 생명으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때 참 기쁘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와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마지막 기도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고귀한 생명의 피로 수많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멘.
앞서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을 영화롭게 할 때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짊어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될 때를 소망했습니다. 앞으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만민이 죄에 매여 사단의 권세 아래서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몇 시간 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리하심으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주님의 권세 가운데 만민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기도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주님의 보호와 다스림 속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거할 것을 선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살리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본문 3절에서, ‘영생’은 헬라어로 ‘아이오니오스’, ‘조에’입니다. ‘아이오니오스’는 ‘영원한’이라는 뜻이 있고, ‘조에’는 ‘생명’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선포하며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아는’의 ‘알다’는 헬라어로 ‘기노스코’입니다. ‘기노스코’는 ‘허락하다, 알게되다, 느끼다, 인식하다, 알아차리다, 분석하다, 확신하다, 이해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구약의 ‘야다’라는 히브리어와 같은 뜻입니다. 부부 관계처럼 아주 친밀한 교제를 통한 경험적인 앎입니다.
하나님은 부부 관계보다 더 친밀한 교제를 인간과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이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났습니다. 성령이 떠나면서 영원한 죽음이 찾아왔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영원한 단절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구원자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 3:16). 그래서 본문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성격이 급할까요? 느릴까요? 답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시간과 마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벧후 3:8, 개정)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아멘. 주님은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창조 사역을 하실 때 6일 동안 모든 것을 만드실 정도로 굉장히 성격이 빠르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성격이 급하신 분이 빨리 영혼을 구원하고 싶으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인간들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이 기다리며,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면서 영혼 구원을 위해 인내하며 느리게 가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향해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되고’(헬라어-‘알레티노스’), ‘진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은 앞서 요한복음 17장 1절 말씀을 다시 반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셔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기에 십자가를 놓지 않겠다는 굳건한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통 만민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날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걸맞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 (십자가)를 짊어 짐으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달라’고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통 우리를 살리려는 마음뿐입니다. 그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이기에 영혼 구원을 위해서 철저히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5절 말씀에 보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을 아뢴 기도였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이미 세상이 조성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던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예수께서도 함께 공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존귀하신 분이셨지만 우리 때문에 천국 영광을 버리고 죄 많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30년 넘도록 하늘의 영광에서 떠나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곧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 하늘의 영광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을 선포하며 기도했습니다. 참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30년 넘게 인간의 몸으로 끝까지 죄를 짓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셨고, 인내하며 견디셨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희생을 통해 이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 활짝 열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한 영혼이 살아나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우리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 삼을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 흘려보내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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