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542장(구주 예수 의지함이)
(요일 4:14-15, 개정)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1) “사도들의 증언”
사도 요한이 쓴 요한일서를 읽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사람들은 속죄해주신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믿었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본 사도들의 객관적인 증언과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주관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아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는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봤습니다. 그 표현을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아멘.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동행했었던 경험을 한 마디로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다”고 간증했습니다. 비록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영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자세히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내린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보았을까요?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보았습니다. 부족한 사람들을 품으시는 모습,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모습,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놓으시는 희생을 사도들이 지켜봤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친 말씀 그대로 행동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으로 치료하셨습니다. 죄인들에게는 긍휼한 마음으로 용서의 사죄를 선포해주셨습니다. 또한 맹인들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연민과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예수의 능력을 사도들은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과 역사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담대히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말과 행동으로 예수께서 하신 기적과 증거들을 보여줬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글로 기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증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겁니다.
2) “세상의 구주”
본문 14절에서, “세상의 구주” 이 “구주”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도 “구원자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적군의 손에서 보호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였습니다.
(사 45:15, 개정)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이사야 시대에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이방인들이 강성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지만, 결국엔 “구원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구주”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구원을 강조했던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는 영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승화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딤전 1:1, 개정)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리고 디도에게도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딛 3:4, 개정)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아멘. 이렇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구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구주”라는 말은 ‘죄로 인해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구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구주”라고 불렀던 겁니다.
(딤후 1:10, 개정)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아멘. 사도바울도 사도 요한처럼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죄로 물든 “세상”, 사탄이 조정하고 있는 “세상”에 속한 죄인들을 구원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의의 빛 아래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과 깊게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다.
사도 요한 시대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지식을 쌓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식도 없었고, 사랑도 없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없었고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지 않았기에 성결한 삶을 영위할 수도 없었고, 희생적인 사랑도 나눌 수 없었던 겁니다.
3) “우리의 시인”
본문 15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아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기독교 외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를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아멘.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그 즉시 시인한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핵심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에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시인”의 뜻은 “어떤 내용이나 사실을 그러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용한 “시인”은 헬라어 ‘호모’와 ‘로게오’의 합성어로써 ‘호모’는 “같은, 동일한”의 뜻이 있고, ‘로게오’는 “말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원뜻은 “같은 말을 하다”의 뜻입니다. 한 마디로 “같은 말을 해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시인”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사실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이유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희생이 없었다면 어떤 사람도 죄와 심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의 구주로 인정하고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인”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5절에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허물과 죄가 있어도 다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데는 기본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막 1:14-15)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아멘. 진정한 “시인”은 믿음과 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10:9-10, 개정)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멘. 참된 “시인”은 이렇게 믿음과 회개가 같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죄에서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인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 안에 거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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