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280장(천부여 의지 없어서)
(요 8:1-11, 개정)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감람산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1-2절). 종교지도자들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했을 정도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부터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요란스럽게 나타나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한 가운데 세웠습니다(3절).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본문 4-5절에서, “(4) ...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종교지도자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웠던 것은 어떤 충고를 듣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간음한 여인을 처리할 방법을 몰라서 데려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에 익숙한 자들이기 때문에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은 불순한 의도로 예수님을 고소할 명분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2가지를 노렸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라”고 대답하신다면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둘째는 “모세 율법에 따라 돌을 던지라”고 대답하신다면 죄인들의 친구로서 사랑과 긍휼에 대해 지금까지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뒤엎으려는 노림수였습니다.
(마 11:19, 개정)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4) 아멘. 이렇게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사랑과 생명을 강조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긍휼과 치유의 대명사로 알려지신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대답하신다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사랑으로 사역하셨던 모든 것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던 분이 모세 율법을 적용한다면 일관성이 없다며 예수님을 정죄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불순한 마음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대답 대신 몸을 숙여 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어떤 내용의 말씀을 쓰셨을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성경학자들도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근접한 견해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견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본문 6절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주를 시험하여 그를 고소할 구실을 얻고자 함이라. 그러나 예수께서 못 들은 체하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다 쓰시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함정인 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못 들은 체하시면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셔서 성난 군중들을 잠재우실 수 있는 행동으로 대처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를 쓰실 때 의미 없는 낙서를 하신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무언가를 정확하게 기록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입니다. 성경 구절일 수도 있고, 여인을 끌고 온 자들의 죄를 조목조목 기록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잘 알고 계셨기에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마음에 품었던 죄악들을 기록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적고 계셨을 때 그 내용을 관심 있게 주목해서 봤을 겁니다.
마음이 급해진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시고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말씀하신 후 또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8절). 예수님은 불순한 의도의 질문을 제시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그 문제를 다시 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아무 말씀 없이 계속 무언가를 쓰고 계시는 동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던졌던 질문이 부메랑이 되어서 그들에게 다시 돌아갔기에 이제 종교지도자들이 대답할 차례였습니다. 만약 돌을 던지면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거짓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롬 3:23, 개정)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아멘.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돌을 들어 여인을 칠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한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떠나가고 그곳엔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9).
무리 중에 돌을 던질 자격이 있으셨던 예수님만 홀로 남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쓰시던 것을 멈추시고 일어나서 그 여인에 묻습니다. 본문 11절에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11절)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최종 판결을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요일 4:9, 개정)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아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고, 어떠한 죄라도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하실 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11절). 용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한날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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