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요한일서 설교

요한일서 3장 16절, 사랑의 모형, 목숨을 버리신 사랑,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

skch712 2022. 7. 1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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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36(환난과 핍박 중에도)

 

(요일 3:16, 개정)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감리교에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전복된 배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어느 한국인 여학생의 생명을 건져주고, 또 다른 학생들을 구하려다 군산 앞 바닷가에서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양화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유골이 없습니다.

 

1)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렇게 아펜젤러 선교사님께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요한복음의 세상과 요한일서의 우리는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죄인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3:23).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15:18, 개정)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렇게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예수님처럼 세상과 다름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0:11, 개정)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아멘.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을 미워하는 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셨고, 진정한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2) “사랑을 알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아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감정을 초월해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참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실 때도 자신을 비난하는 죄인들을 향하여 (23:34, 개정)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랑의 눈먼 왕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외면당하고,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10번씩이나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살펴보고, 손으로 직접 예수님의 손을 만짐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경험적으로 깊이 알게 되었던 겁니다. 더 이상 제자들은 예수님과 결코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8:39, 개정)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결코 끊을 수 없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맺어놓으셨습니다.

 

3) “목숨을 버리자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되어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부부관계를 맺게 하려는 열심 있는 중매쟁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고후 11:2, 개정)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아멘. 이처럼 사도바울은 중매를 통하여 한 몸을 이룬 부부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머리와 몸으로도 비유했습니다. 머리와 몸이 항상 같이 붙어 있듯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1:22-23, 개정)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아멘. 머리가 가는 곳에는 몸도 같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영광을 받으면 몸도 영광을 받게 됩니다. 머리가 고난을 받으면 당연히 몸도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의 원리를 깨달았던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외쳤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님의 몸인 우리도 똑같이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만 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받고 있었던 사도바울을 목숨을 걸고 보호했습니다. (16:4, 개정)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아멘. 이렇게 바울을 위하여 목숨 걸고 보호해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형제들을 사랑하셔서 몸소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몸은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몸 된 교회로써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날 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보고, 경험적으로 만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도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갈 때 신앙의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형제를 위해서 죽지 않으니까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봉착해 있습니다. 머리가 죽었는데도, 몸이 멀쩡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면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머리 되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어서 낮아지고, 죽어지고, 썩어져서 열매 맺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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