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마태복음 설교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루살렘 입성, 어린 나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평화의 왕, 사순절 설교, 종려주일 설교

skch712 2024. 3. 8. 00:15
728x90

 

 

찬송 38(예수 우리 왕이여)

 

 

(21:1-11, 개정)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두 제자를 앞서 보내시며 맞은편 동네로 들어가 새끼와 함께 묶여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 오늘 본문 2에서는 나귀와 함께 새끼도 데려왔다고 말씀하고 있고, 마가복음누가복음에서는 단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어린 나귀만 말씀하고 있습니다(11:2, 19:30). 마가누가어린 나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본문 2에서 어미 나귀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았던 어린 나귀를 택했다는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왕이 입성할 때 왕의 전용 군마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군마처럼 화려한 치장도 하지 않는 평범한 나귀 새끼였고 게다가 예수님이 타신 어린 나귀는 평범한 동네 사람에게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기에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초라한 옷차림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는 살아갈 날이 많기에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초라한 나귀 새끼가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실 구원자 예수님을 태우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연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우리도 어린 나귀와 같이 세상을 향해 주님을 전하도록 위대한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명을 받고 동네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주셨습니다. 누군가 왜 나귀를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실 것이라고 대답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새끼 나귀의 주인이 순순히 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 사실 예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모든 우주의 소유주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재산과 생명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주님이 쓰시겠다고 명령하시면 아낌없이 내어 드리는 자세가 성도의 도리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았기에 주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예수님의 살리는 사역을 방해할 때가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방법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지혜롭고 경험 많은 똑똑한 사람을 두고서 흠 많고 연약한 이들을 쓰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연약할수록 겸손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타지 않았던 것은 말은 싸우고 전쟁할 때 타는 것이기에 어린 나귀를 탔던 겁니다. 예수님은 전쟁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고 평화의 왕으로 십자가에 죽기 오셨기 때문스가랴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셨던 겁니다(5). (9:9-10, 개정)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아멘.

 

두 제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해서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인이 와서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그들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주께서 쓰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가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신의 겉옷을 나귀 새끼 등에 덮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겉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6-7, 11:4-7, 19:32-35).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했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펼치고 나뭇가지를 깔았습니다(8). 군중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맞이한 것은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색 레드 카펫을 깔아 VIP를 식장 안으로 모실 때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붉은색 레드 카펫이 예수님께서 환영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의 피 흘리심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환영했을 때 사람을 한 번도 태우지 않았던 나귀 새끼 옆에 어미 나귀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당황스러운 행동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태는 어미 나귀까지 성경에 기록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9에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아멘.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싸우기 위해 오지 않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환영하는 호산나였지만, 앞으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실 때는 무리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함성으로 바뀌게 될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죽기 위해 그곳에 가셨고, 죄와 죽음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려고 입성하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환영했던 무리가 눈이 어두워 제대로 영적인 자각이 없음을 보시고는 예수님은 슬퍼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42, 개정)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아멘.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 모든 백성이 환호하며 즐거움으로 맞이했지만 그들의 눈은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호성은 오래가지 않아 괴성으로 바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칭송과 높이는 공허한 외침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환호성 뒤에 숨겨진 무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 몇 가지 도전을 받습니다. 첫째로,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 없던 나귀 새끼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부족해도 주님은 우리를 능히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어떠한 제재도 없이 순순히 자신의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도록 내어 드린 나귀 주인처럼 우리도 모든 소유와 생명까지도 기꺼이 주님께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 앞에서는 눈 가리고 아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환호성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신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복된 사순절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