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94장(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마 23:37-39, 개정)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한 가장 큰 적은 로마인보다도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3장 31절에서,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언뜻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을 증오했던 자들이 그럴 리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헤롯과 결탁하여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싶었을 겁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고 난 후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 당황했습니다. (막 6:16, 개정)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헤롯의 죄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헤롯은 양심의 가책을 잠재우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인파가 많이 몰릴 때 예수님이 소란 피우지 않고 예루살렘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겁니다. 헤롯과 바리새인들은 똑같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으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기에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만 좀 떠나 주기만 해도 예수님 때문에 일어났던 소동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32절에서,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아멘.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여우는 잔인하고 교활한 동물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던 헤롯이 세례요한도 죽이고, 이제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예루살렘을 사수하셨습니다. 어차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아멘. 얼마 후면 십자가에서 못 박힐 것이지만 예수님의 살리는 사역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37절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수없이 많은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키고 회개하라고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외쳤으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심판을 선포했던 것은 잘못을 비난하기보다는 아픈 마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애통해하셨던 예수님을 본심을 헤아려야 합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이켜야 살 수 있으니까 제발 좀 내게로 돌아오라는 절규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해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애통해하며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죄의 결과에 무시무시합니다. 본문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버려지게 될 것을 예수님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버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외면했던 유대인들은 이천년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며 아끼셨던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예언이 무섭고 두렵기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외면하면 이스라엘 본 가지도 꺾으셨는데 접붙여진 이방인 가지도 꺾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3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구세주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날, 이 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이중적 의미로 풀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주의 이름을 찬송하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후 지옥에 들어가 그제야 예수님이 메시아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탄식하며 소리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은 후에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이 계속 애통해하시며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말씀을 통해 죄와 허물을 경고하실 때 그것을 듣고 돌이키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복인 줄 믿습니다. 죄를 깨달아야 십자가 앞으로 나가서 우리 심령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이키라는 엄중한 외침에 반응하며 우리 심령이 회복되는 복된 사순절의 여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