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184장(불길 같은 주 성령)
(요 14:15-18, 개정)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씀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아멘.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에 매여 본질을 놓쳤던 유대인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멀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의 형식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이고(롬 3:20),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했습니다(롬 13:10).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던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이적과 기사를 봤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참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켰을 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자신을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그 모습을 본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막 15:39, 개정)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아멘. 기적보다도 원수를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보내시면서 사랑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아멘. 여기서 “계명”은 헬라어로 “엔톨레”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서 말씀하셨던 “새 계명”과 같은 단어입니다(요 13:34). 길을 가다가 부자 관원이었던 청년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1-4계명을 말씀하시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5-10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도 “엔톨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킬 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확증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으로 마음으로 말로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랑을 더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대상이 모든 영혼이었습니다. “계명”이라는 단어 안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며 섬기라는 주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우리는 헤아려야만 합니다.
(요 15:12, 개정)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아멘.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원치 않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을 때 보통 사람들은 가족들을 불러놓고 용서를 구합니다. 살면서 아웅다웅 서로 미워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잘못했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화해하지 않고 가면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계명”을 지킬만한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6). 본문 16절에서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대언 하는 법적 변호사’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보혜사는 사도 요한만 사용했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보혜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진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조력자’라고 묘사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힘써 도와주시는 조력자가 되십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는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힘써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령이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본문 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알레테이아 퓨뉴마”, “진리의 영”이라고도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참되다’라는 뜻을 가진 ‘진리’라는 단어를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아멘. 여기서도 ‘진리’라는 “알레테이아”를 예수님이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되시고, 변하지 않는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써 예수님을 증거 하시는 역할을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을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좀 혼돈되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다는 뜻이라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의 말씀과 대치되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고아와 같이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해석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날지라도 연약한 제자들을 힘써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약속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사려 깊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힘써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동행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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