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장(무덤에 머물러)
(요 20:1-10, 개정)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안식 후 첫날 일찍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찾아갔습니다(1절). 오늘 본문 1절에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단어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주일에 창조 사역을 시작해서 금요일까지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친 후 토요일에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되었을 때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서 창조 질서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창조 질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하는 데 있었습니다.
죄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나가셨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120년밖에 살지 못하는 영원한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창 6:3,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나의 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성령’입니다. 죄가 들오니까 성령이 떠나가고 생명도 잃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교제권을 상실하고 말았던 겁니다. 모세 오경을 통해 ‘안식일’을 확립했지만 온전한 안식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때 진정한 안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 성령을 다시 인간들에게 돌려주시기 위해 인간을 심판하지 않고 대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 심판을 받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떠났던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영과 진리”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을 받게 되고 영이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토요 안식일은 신약에 와서 부활의 새 창조가 시작된 안식 후 첫날인 주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물리치신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안식일로 대체하여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에게 보혜사 성령과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주신 완전한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는 것이 헛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이었던 주일을 지켰고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완전한 새 창조의 시작점인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빈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 중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4장 10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 등장합니다. 사복음서에서 가장 비천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약한 자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요한은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고전 1:27).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가 안식일 전날이었기에 향품을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시간이 촉박했기에 제대로 발랐는지 궁금했습니다. 이른 아침이 되자마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향품을 준비해 갔습니다(막 16:1). 그런데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치워져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1절). 놀란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 요한에게 달려가서 알렸습니다(2절).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해 누가 먼저 도착하나 같이 달음질쳤습니다(4절).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나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5절).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6-7절).
본문 6-7절에서, 사도 요한은 세마포와 머리에 쌌던 수건이 가지런히 놓인 것을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고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세마포와 수건을 잘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자기 머리에 쌌던 수건을 딴 곳에 정리해 둠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본문 8절에서, 다른 제자였던 요한도 무덤에 들어가 머리에 쌌던 수건이 다른 곳에 잘 정리된 것을 보고 ‘믿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성경의 가르침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는 못했습니다(9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빈 무덤을 봤던 두 제자는 이성적인 머리로는 믿었으나,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경험해보는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부활 신앙을 머리로 믿기 보다는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믿는 자에게 더 필요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성령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이 가득한 한날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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