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요한복음 설교

요한복음 12장 12-19절, 예루살렘 입성, 호산나, 어린 나귀, 전쟁이 아닌 평화

skch712 2024. 6. 2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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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80(천지에 있는 이름 중)

 

(12:12-19, 개정)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아멘.

 

* 우리 성도님들을 주안에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습니다. 본문 12에서,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기 전 마지막 재앙이었던 장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것에서 유래된 절기입니다(12).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을 돌아다닐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건너가고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가정의 장자는 목숨을 잃게 되었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절기였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처럼 예수님은 이제 곧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묶고 있는 죄의 사슬을 예수님의 피로 끊어내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발을 씻겼기에 예수님의 장례 준비도 끝난 상태였습니다. 죽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할지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길을 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3) 이렇게 호산나의 외침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군중들의 외침은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기적들을 행하신 분이라면 분명히 민족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며 호산나, 지금 구하소서라고 외쳤던 겁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관심사와 다르게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적으로 죄의 압제로부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군중들의 열망을 이해하셨으나 군중들의 환대에 나귀 새끼를 타고 응대했습니다.

 

말이 전쟁에 사용하는 동물이지, 나귀는 전쟁에 사용하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평화로울 때 교역품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하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스가랴 99-10 말씀의 예언을 이루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아멘.

 

요한복음에서는 스가랴 99절만 인용했지만, 스가랴 910의 말씀을 함께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온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 왕이 임하실 때 그분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며 전쟁을 끊겠고,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했고, 그의 통치는 온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군중들은 쿠데타를 원했으나 예수님은 평화의 메시지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를 흘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바라던 정치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기에 영적인 안목이 열리지 않아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16).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했던 이유본문 17-18말씀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현장에 있었던 무리가 그 사건을 증언했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2.8Km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소문은 금방 예루살렘 전역에 퍼질 수 있었고,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고 죽이는 전쟁의 도구였던 말을 타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자신만 피 흘려 죽기 위하여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평화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모든 인생을 변화시키고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악한 세력의 묶임에서 풀어주고 자유를 주시려고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평화를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희생하고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평화를 끼칠 수 있는 성숙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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